


래미안 원베일리는 흔히 신축 아파트들이 내세우는 거대한 문주를 세우지 않았다.대신 아파트의 입구는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쇼핑몰, 일명 고투몰의 끝자락과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고투몰의 끝을 돌아 원베일리로 스며드는 모퉁이 우측에는, 무심코 지나치기엔 묘한 서사를 품은 지하 공공보행통로가 입을 벌린다. 재건축 사업과 연계해 정비된 이 길은 지하상가에서 한강공원으로 이어지는 핵심 보행 동선이자, 도시의 발걸음이 모이는 관문이다. 한때 캄캄하고 단조로웠던 회색빛 지하도는 스페인 말라가 관광청과의 협업을 거쳐 피카소의 거친 숨결을 품은 스트리트 갤러리로 탈바꿈했다. 말라가 청년이 그려낸 피카소의 조각난 시선 위로 국내외 작가들이 빚어낸 서울의 24시간이 겹쳐지며, 단순한 이동 공간을 넘어선 문화·예술적 가치를 지닌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통로에 진입해서 몇십미터 걸어 들어가자, 아직은 낯선 클라이밍 교습소가 눈길을 붙든다. 알록달록한 인공 암벽의 돌기들이 숨을 죽인 채 벽에 박혀 있다.저 가파른 색색의 벽을 붙잡고 어디까지 기어오를 수 있을지 가늠하다가, 씁쓸하고도 아득한 웃음을 흘린다


길목에 뜬금없이 야외무대가 불쑥 얼굴을 내민다. 한강으로 흘러드는 발걸음들이 잠시 멈춰 서서 기타를 튕기고 노래를 뱉어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무심한 콘크리트 틈새에 숨겨둔 날카롭고도 그윽한 안목이 스며 나온다


넓은 시야가 트이며 지역문화센터의 문이 열린다. 치솟은 층고와 광활한 공간은 어떤 거친 모임과 워크샵이든 너끈히 품어 안는다. 그 시원한 허공 속에 숨겨진, 알짜배기로 단단한 공간의 숨결이 깊게 밀려든다


500여 미터의 지루한 길을 묵묵히 걷다 보면, 지친 발걸음을 달래는 싱그러운 녹음의 휴게 공간이 불쑥 고개를 든다. 그 초록의 쉼터 위로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원베일리 118동이 거대하고 웅장한 자태를 무심하게 드러낸다


이런 깊은 지하에 있을 법하지 않은 고터·세빛 관광안내센터가 문을 열고 버티고 섰다. 한강으로 밀려드는 사람들의 거대한 발길과 숨결이 이 길목에 가득하다는 무언의 증거다. 그 안내센터의 바로 옆, 원베일리 120동 앞으로 지상의 빛을 향해 치솟는 엘리베이터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서 있다


통로의 끝에 다다를 무렵, 원더스트리트 전시회의 조형물들이 불쑥모습을 드러낸다. 그 이름처럼 경이로운 길거리가 되어, 무심하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지하통로의 끝에 이르자, 가늘 하늘을 향해 열린 계단이 가파르게 몸을 세운다. 그 위로 옅은 구름과 초록 푸름 아래 소나무의 결이 원베일리의 거대한 동체와 어우러져 아득한 풍경을 빚어낸다. ‘당신의 오늘을 그려 달라’는 벽면의 대자보 앞에 멈춰 서서, 묵묵히 지우고 칠하며 나의 오늘을 한 조각 색으로 채워 넣는다

발길을 돌려 다시 고투몰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벽면을 가득 채운 피카소 거리의 그림들을 눈에 담으며, 지나온 일상의 풍경들을 가라앉히듯 묵묵히 되짚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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